본문 바로가기

취미

호세. 그가 떠난다.

2007년 5월 12일. 펠릭스 호세의 퇴출결정 기사가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구단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호세의 기사에는 댓글이 200개 가량 달려있군요.

이맘때 쯤 되면 각 구단들은 선택했던 용병들의 시즌 초반에 낸 성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용병으로 갈아탈까, 계속 유지할까 결정을 하여 떠들석 해집니다.
그런 시기에 "최고의 용병" 찬사를 받던 펠릭스 호세가 퇴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먼저 변명의 여지도 없이 퇴출되었다는 것에는 "롯데가 잘못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펠릭스 호세

이제 우리곁을 떠나는 호세



우선 그가 퇴출이 된 가장 큰 원인인 시즌 초반 성적을 놓고 이야기 해봅니다.
"최고의 용병이다","호세다"라는 인식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그냥 시즌초반 뽑은 용병이라는 기준에서 그의 시즌 초반의 성적을 놓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그의 성적은 홈런1 타율 .256 타점 12가 주요 성적입니다.
홈런 1이라는 것이 퇴출이 결정된 가장 큰 원인입니다.
사실 장타를 생산했던 무시무시한 펠릭스호세는 이제 없어졌습니다.
나이 42. 아킬레스 부상 회복이 더뎌진 이유입니다.
하체를 살리지 못하는 스윙으로 인해 장타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야구 초보자라도 아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작년 시즌 몸무게를 줄이고 날렵한 모습으로 돌아온 호세에게 상체만으로 홈런을 하나라도 쳐냈다는 것은 역시 호세입니다.
그리고 이대호의 동점홈런으로 아시아 최고의 마무리, 오승환의 방어율 0을 박살냈던 그 다음 경기에서
중견수가 잡아낸 호세의 홈런성 타구가 아마도, 호세의 퇴출을 결정 짓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임창용의 150직구를 밀어내어 홈런을 만들던 모습을 계속 기대한다면 당연히 퇴출감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구는 홈런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롯데는 이대호의 홈런 7개로 팀홈런 11개를 유지하는 팀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3위를 마크하고 있습니다.
홈런 1보다 타점 12에 주목했다면 어땠을까요.
호세의 타점 순위는 현재 23위이지만 2타점 적시타 하나만 날려도 당장 11위대로 점프합니다.
롯데 경기를 모두 볼 수 없었던 제가 내리는 결정입니다만,
타점 12점이 그가 늙어버린 때문일까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호세는 보통 5번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의 앞타석에 들어서는 리그 현존 최고의 타자 이대호의 타점은 21점,
롯데자이언츠의 테이블 세터진의 출루율은 안습입니다.(이승화는 20위대, 정수근, 김주찬 등은 이름도 없습니다.)
3번 타순에서 활약하던 노장 박현승이 득점 19 점으로 2위입니다. 이대호의 타점보다 낮은 수치입니다.
결국 호세 앞에 과연 많은 주자가 있었냐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과연 퇴출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심심치않게 호세를 피하던 상대팀 투수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클런치 상황에서 고의사구는 아니지만, 그에게 당당히 상대하는 투수를 별로 보지 못한거 같습니다.

타율 .256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현재 KBO에서 나설정도로 심각한 투고타저 상황입니다.
8개 팀으로 이루어진 리그에서 방어율 2점대 선발투수가 10명이 넘습니다.
물론 .256 타율은 리그 순위 30위에도 못드는 성적이지만
4월 성적 믿을게 못된다는 속설과 함께, 경험많은 호세의 타격 테크닉을 믿었으면 어땠을까요.

이제 "호세"라는 이름 값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사실 호세의 퇴출에서 호세를 변명하기위해 자료를 찾고, 상황을 생각하고 하는 일이 오히려 호세를 욕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호세가 차지했던 비중을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1982년 창설된 한국프로야구의 창단 맴버인 롯데 자이언츠는 현재 2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롯데에서 호세는 1999년 입단하였습니다.
입단 초기부터 그는,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우수한 거포의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프로야구 통산 10000번째 홈런을 작렬함으로서 드디어 조금씩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또한 1999년은 1992년 롯데의 우승이후에 사람들에 가슴속에 남아있는 가장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는 항상 호세가 있었습니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그의 감동적인 홈런과
대구 구장 난동은 롯데자이언츠와 관련된 팬이나 선수들을 모두 똘똘 뭉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하였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지난 1992년 우승보다 1999년의 감동이 더욱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1999년 롯데

1999년 롯데 클린업 트리오



2001년에도 롯데에서 활약하였지만 경기외적으로 롯데자이언츠는 좋지못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또한 2001시즌은 중위권 싸움이 매우 치열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삼성 배영수를 가격한 일이 있었고
호세는 국내 야구에 발을 붙일 수 없게되며, 호세가 없는 롯데는 중위권 싸움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제공하게 한 선수가 선발 에이스 투수로 뛰는 팀의 우승 확정식을 눈앞에서, 자기 안방과 같은 곳에서 하고 있는데, 곱게 보고 넘어갈 팬이 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저도 동참했습니다만...)

그후로 사실 호세가 없는 롯데 자이언츠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승엽을 육성한 야구사에 큰 공로를 남긴, 롯데 자이언츠의 새로운 감독은 또 다른 이승엽을 육성하려 했던 것인지, 그에게 지도를 받은 선수들은 오히려 헤매는 선수가 더 많아 보였습니다.
결국 롯데구단은 빈약한 타선을 보강하기위해 용병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 마다 항상 "호세만한..."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용병중에 남아있는 용병이 누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롯데 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까지 활약했던 데이비스이외에 용병타자로 누가 아직 남아있습니까...
각기 구단이 용병을 뽑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용병 자체가 드문 겁니다...
결국 롯데 자이언츠는 KBO의 호세 영구퇴출 규약을 없애고 호세를 다시 영입하기위해 애를 씁니다.
2005년 양상문 감독이 팀을 재정비하자 롯데 구단은 뜬금없는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드디어 호세를 영입하고 롯데와 또다른 애증의 관계인 강병철 감독을 사령탑에 앉힙니다.
그리고 호세는 투고타저 속에서도 홈런 2위로 이인자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전의 호세가 아니라는 걸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호세와 롯데의 관계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8년간이나 계속 되어왔습니다...
26년의 롯데 역사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1/3을 지배한 펠릭스 호세.
이제 그가 떠나갑니다.
이제 다른 어떤 선수가 그의 빈자리를 메꾸어줄지 기대하는 것으로
스타를 보내야 하는 것이겠죠.

비록 퇴출선수이지만 롯데에서 환송식이라도 준비해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

의아해서 “왜 받았냐”고 묻자 이승엽은 “대단한 선수 아니냐.기념으로 한 장 받고 싶었다”며 웃었다.그는 “정말 존경할만한 선수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
그런데, 펠릭스 호세(41)는 누구일까.
5년 만에 롯데에 복귀한 호세는 부산 팬들의 뜨거운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1999년과 2001년, 딱 두 시즌 동안 보여준 위력은 그를 '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호세만큼 국내 언론에 자주 소개된 외국인 선수는 드물다. 그는 부산의 '검은 갈매기'이자 '호세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든 강타자다. 선수들의 사생활을 좀체 다루지 않는 스포츠 보도 관행이 무색하게 '밤의 황제'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호세가 어떻게 처음 야구를 시작했는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떤 성공과 시련을 겪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부산의 스타'이기에 앞서 다섯 아이의 아버지이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사상 처음으로 영입한 도미니카공화국 국적의 선수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타율 3할3리를 친 다음해 메이저리그에서 쫓겨나는 시련도 겪었다.
호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주간야구'는 3월16일 부산 사직구장 내 선수 회의실에서 호세를 만났다. 호세가 말하는 호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화제다. 당신은 ‘중남미판 월드시리즈’인 캐러비안시리즈에 도미니카 대표로 뛰었다(1992, 2002, 2003년). WBC와 수준을 비교하면 어떤가.
거의 똑같다고 보면 된다. 시즌이 끝난 뒤 중남미 최고의 선수들이 나라를 대표해 출전한다. 윈터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아 몸 상태도 시즌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미국 WBC 대표팀이 캐러비안시리즈에 나간다면 우승을 장담할 수 있나.
쉽게 말하긴 어렵지만, 힘들 것이다. 미국 선수들은 몸이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다. 후쿠오카에서 한국, 일본 대표팀을 봤다. 그들은 훈련이 잘 돼 있었다. 두 나라가 선전하는 이유는 역시 훈련 때문이다.



호세는 2월25~26일 후쿠오카 야후돔에서 롯데와 WBC 한국 대표팀의 연습경기에 출전했다. 틈나는대로 WBC 경기를 TV로 본다.



-한국 야구는 마이너리그로 치면 더블A인가, 트리플A인가.
무슨 소리냐. 메이저리그 수준이다. WBC에서 한국 선수들은 메이저리그급 플레이를 하고 있다. 이승엽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을 상대로도, 미국을 상대로도 홈런을 쳤다. 내년에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이승엽을 보고 싶다. 수준 차는 거의 없다. 새로운 리그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2001년에 보던 이승엽과 지금 이승엽에 차이가 있던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훌륭한 선수다. 좋은 타이밍에서 홈런을 치고 있다. 이승엽은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고, 열심히 야구를 하는 선수다.



지바 롯데 김성근 코치는 "지난해 이승엽은 왼쪽 어깨가 흔들리는 결점을 고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세는 이승엽의 타격 폼에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삼성 시절 이승엽을 지도했던 박흥식 코치도 "정신적으로 좀 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지만 당시와 타격 폼에 큰 차이는 없다"며 호세와 같은 평가를 내렸다. 2001년에 비해 오른쪽 다리를 적게 들어올린다는 정도가 차이다. 결국, 지난해 이승엽은 한국에서 가장 좋았을 때 타격폼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다.



-이젠 일 이야기를 하자. 2002년에 롯데와 재계약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돈 문제였다. 나는 성적 만큼의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구단은 "여기는 메이저리그가 아니다"하고 했다. 전임 단장과 이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다.
-5년 만의 한국 복귀인데 달라진 점이 뭔가.
새로운 선수들이 많아졌다. 한국 야구도 많이 발전했다. WBC를 보면 알 수 있다. 새로운 선수들을 상대로 새로운 야구에 도전한다는 생각이다. 단장도 새 단장이 오지 않았나.
-나이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일본 전지훈련을 잘 소화했다.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몸무게도 110kg에서 106kg으로 줄였다. 나는 훈련으로 더 강해졌다.
-개인적으로 목표가 있다면.
플레이오프 진출이다. 다치지만 않는다면 좋은 플레이를 보여 줄 수 있다. 홈런 30개는 넘길 자신이 있다.



호세는 일본 전훈 때 지난해 홈런왕(35개)인 현대 래리 서튼을 만났다. 만남 뒤 구단 관계자에게 "나는 2001년에 117경기만 뛰고 36개를 쳤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서튼이 자신과 비슷한 119경기에만 뛰었다는 점은 알지 못했다.



-부산이 그리웠나.
정열적인 팬들을 잊지 못한다. 팬들은 나를 수퍼스타로 대접해 줬다. 그 덕분에 편하게 게임을 치렀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돼 기쁘다. 팬들 덕분에 구단에 불만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았다. 훈련도 더 열심히 했다. 부산에서 나는 마치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팬들이 그런 느낌을 선사해줬다.



-2003년부터 마이너리그가 아닌 멕시칸리그에서만 뛴 이유는.
마이너리그는 빅 리그에 도전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한 무대다. 수입도 멕시칸리그가 낫다. 물론 연봉은 한국이 더 좋지만 멕시코는 집에서 더 가깝다.
-미국 야구, 중남미 야구, 아시아 야구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야구는 어디에서나 야구다. 큰 차이는 없다. 대륙 별로 약간 다르긴 하다. 가령 미국이나 중남미 투수들은 빠른 모션으로 공을 던진다. 그러나 동양 투수들은 와인드업을 주로 한다. 하지만 작은 차이일 뿐이다. 결국 야구는 똑 같다.



-가족들은 잘 지내나.
아내와는 헤어졌다. 도미니카 출신 걸프렌드가 있다. 집은 플로리다에 있다. 아이들은 모두 다섯 명이다. 제일 큰 애가 열세살이다. 가능하면 올해 한국으로 부르고 싶다. 아이들을 사랑한다.
-마흔이 넘어서까지 야구를 하며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생활을 했다. 여름 뿐 아니라 겨울에도 윈터리그에서 뛰었다. 나쁜 아버지 아닌가.
시즌 사이에는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시즌 중에도 아이들과 자주 전화 통화를 한다. 짬이 날 때마다 집에 들른다. 나는 가장이다. 돈을 벌어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아이들도 이 점을 이해한다. 나는 '호세 스타일'로 좋은 아버지다.



-이제 옛날 이야기를 해 보자. 야구를 어떻게 시작했나.
내 아버지는 야구의 '야' 자(字)도 모르던 분이었다. 가족 중에도 야구를 한 사람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체조 선수였다. 야구는 우연히 접했다. 열두살 때였다. 어느날 체조 훈련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가 “야구라는 게임이 있다. 한번 보러 가자”고 권했다. 그 뒤로 나는 야구선수가 됐다.
-프로 계약은 언제 했나.
후안 마리찰(도미니카 출신 메이저리그 통산 243승 투수)이 운영하던 야구팀에서 뛰다 열아홉살이던 1984년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계약했다. 그때는 도미니카에 야구 아카데미가 생기기 전이었다. 오클랜드는 나를 포함해 선수 도미니카의 어린 선수 20명을 애리조나의 스프링캠프로 보냈다. 메이저리그에서 11년을 뛴 루이스 폴로냐가 나와 함께 미국 땅을 밟은 동료다. 그 해 루키 리그(파이오니어 리그)에서 첫 프로 시즌을 맞았다.



애리조나 캠프에서 소년들은 주말에는 도미니카의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기숙사에 수용됐다. 상수도 시설이 없는 빈민가 출신이 대부분이라 집에서 병이 걸려 돌아오는 소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명 가운데 14명이 기생충 감염 진단을 받았다. 구단은 ‘도미니카 집에서는 물 대신 콜라를 마실 것’이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오클랜드의 첫 도미니카 출신 선수였다. 어려움은 없었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타향살이한다는 게 고생이라면 고생이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도미니카에서부터 '반드시 미국에서 야구를 할 것'이라는 뜻을 굳히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나와 같이 애리조나에 왔던 친구들은 대부분 중도에서 그만뒀다.
-1984년 계약금은 얼마였나.
4000달러였다.
-중남미 선수들은 지금도 미국이나 아시아계 선수들보다 훨씬 적은 계약금을 받는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처럼 중남미 출신으로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한 선수들은 드래프트로 입단한 미국 선수들보다 적은 돈을 받는다. 불공평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미니카 동포인 세자르 세데뇨(1970년 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간판 스타. 호세와 같은 산토 도밍고시(市) 출신이다)나 페드로 게레로(올스타에 5회 뽑힌 1980년대 LA 다저스 외야수)를 영웅으로 생각하며 야구를 했다. 언젠가는 세데뇨나 게레로가 뛰는 야구장을 밟고 싶었다.
-1988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해 마이너리그에서 정말 좋은 시즌(트리플A 타코마에서 타율 3할1푼7리, 12홈런, 83타점을 기록했다)을 보냈다. 나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언젠가는 메이저리그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경력은 뒷날 멕시코나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



1988년 9월2일 뉴욕 양키스와의 원정경기가 호세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호세는 9회초 대타로 나서 데이브 리게티에게 삼진을 당했다. 첫 안타는 9월14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서 기록했다. 7회초 호세 칸세코의 대수비로 출전한 호세는 9회말 선두타자로 나가 우익수 쪽 2루타를 날렸다. 상대 투수는 케빈 브라운이었다.



-199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이때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나.
아, 1991년은 좋은 시즌이었다. 무엇보다 매일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이때가 최고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 노력하고 있다. 나이가 많아도 전성기를 누릴 수 있다. 훌리오 프랑코를 보라. 나이가 몇인가.(그는 48세다.)
-1993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로 트레이드된 뒤 부진했는데.
왼쪽 어깨에 부상이 있었다. 수술을 받았는데 그 뒤로 제 컨디션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1번과 4번을 쳤으니 나쁜 시즌은 아니었다.
-1994년에 타율 3할3리(99경기)를 기록한 뒤 이듬해 방출됐다. 이유가 뭔가.
힘든 때였다. 파업으로 시즌이 일찍 끝났고, 1995년에도 파업이 이어졌다.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사실, 캔자스시티로 원치 않는 트레이드를 당해 의기소침해 있었다.



방출 이유에 대해 호세는 자세한 설명을 피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호세는 부상 후유증에 시달렸고, 체중 조절에도 실패했다. 수비 불안으로 코칭스태프의 신임을 잃었다. 캔자스시티에는 호세를 대신할 외야 유망주들이 많았다. 호세 대신 들어 온 유망주 가운데는 WBC 미국 대표인 자니 데이먼과 2000, 2003년 LG에서 뛴 브렌트 쿡슨도 있다. 호세는 1997년 멕시칸리그, 1998년 독립리그, 1999년 한국에서 뛰며 메이저리그에서 ‘잊혀진 이름’이 됐다.



-토니 라루사, 화이트 허조그, 조 토레, 밥 분 등 여러 메이저리그 감독 아래서 뛰었다. 감독 평을 한다면.
세인트루이스 시절 토레 감독이 가장 좋았다. 조는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열정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나와도 스타일이 맞았다. 내 야구를 이해하고, 믿어줬다. 다른 감독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호세는 1999년 롯데에서 뛴 뒤 2000년 양키스 선수로 5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양키스 감독은 세인트루이스 시절 은사였던 토레였다.



-메이저리그 감독과 한국 감독의 차이는.
한국 감독들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훈련을 시킨다. 훈련 강도도 높다. 한국에서 열심히 훈련한 건 내게 큰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첫 시즌을 보낸 뒤 보다 나은 선수로 발전했음을 느꼈다.



-90년 대 중반까지는 홈런 타자라기 보다는 1번 타자에 더 어울리는 선수였다.
그때는 스트라이크 존을 정확하게 읽고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날리는 타자였다. 오클랜드나 세인트루이스의 홈구장 외야는 매우 넓다.(호세는 두 구장의 외야 펜스 거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홈런보다는 2루타를 노렸다. 하지만 멕시코나 한국 팬들은 메이저리그 출신인 내게 홈런을 원했다. 홈런 타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많이 했다.



-인터뷰에 응해 줘 고맙다. 그라시아스(스페인어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한국 말로)

=====================================
호세 관련 기사는 계속 수정하며 업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