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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100완투의 고독한 전설, '황태자' 윤학길

100완투의 고독한 전설, '황태자' 윤학길
[오마이뉴스 2006-12-01 10:28]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롯데 자이언츠 팀 역사상 가장 많은 공을 던지고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는 윤학길이었다. 그러나 자이언츠의 역대 투수 중에서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이름은 기껏해야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는 '고독한 황태자'라는 우아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흔히 다른 투수들에게 붙는 별명이 '마당쇠', '싸움닭' 혹은 '폭격기' 같이 거친 것들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조금 특이한 별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윤학길은 '고독할' 정도로 예민하지도 않고 '황태자'라 불릴 정도로 화려한 외모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누구에게서든 '황태자'처럼 특별대우를 받는 처지도 아니었다.

오히려 '통산 100완투게임'이라는 진땀나는 그의 기록에 비추어본다면 '마당쇠'를 넘어 '상머슴'으로 불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게 그의 선수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자이언츠 선수라면, 그것도 자이언츠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라면 모름지기 공필성이나 박정태 같은 근성이 있어야 한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악다문 턱선의 꿈틀거림이 있어야 자이언츠다운 야구다.

지나치게 온순한 선수

▲ 05년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열린 올드스타전에 출전한 윤학길
ⓒ2006 롯데 자이언츠
반면 187센티미터의 거한 윤학길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온순했다. 일년 내내 지켜보아도 파이팅을 외치는 고함 소리 한 번 없었고, 상대 타자의 도를 넘는 도발에도 멋쩍은 웃음이 전부였다.

심판의 부당한 판정이 나와도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경기의 결정적 고비에서 그가 한복판에 찔러 넣은 공이 볼 판정을 받고도 별 수 없이 넘어가자면 사직야구장의 관중석에서는 심판을 향한 분노의 함성 사이로 '저런 등신…' 하는 원망 섞인 신음이 흐르곤 했다.

그런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그는 초반 실점이 많았다. 매 경기 1회 넘기기가 어려웠고 그것을 넘기면 완투나 완봉으로 갔다. '1회만 무실점이면 완봉'이라는 것이 그의 별명처럼 회자되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그는 큰 경기, 결정적인 순간에 약했다. 자이언츠가 두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선발로 등판해 완투했지만 5점을 내주고 패하는 바람에 한 번의 위기를 불러왔다.

그 뿐 아니다. 91년 3차전 무승부 때문에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 최종승부에서 삼성으로 옮겨간 팀 선배 김용철에게 역전홈런을 맞으며 한 해 먼저 한국시리즈에 도전할 기회를 날려버렸고, 95년에도 역시 한국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에 선발로 나서 단 한 개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한 채 3안타를 맞고 물러나 맥 빠지게 우승컵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윤학길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자이언츠의 우승도전 좌절사의 가장 뼈아픈 대목마다 이름을 새겨놓고 말았다. 그래서 84년 한국시리즈 '홀로 4승' 신화의 최동원은 물론이요, 종종 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박동희, 그 해 같은 17승을 올렸던 염종석에게도 그 기억이 밀린다. 때로는 주형광이 그의 앞에 놓이기도 한다. 그렇게 윤학길이라는 이름은 모를 리 없을 만큼 꾸준했지만 먼저 떠오를 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롯데 자이언츠는 좋은 투수가 많았던 팀이다. 최동원부터 시작해서 박동희, 염종석, 주형광 그리고 손민한으로 이어지는 에이스의 계보는 그대로 당대 한국 프로야구리그 대표투수의 명단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투수놀음'이라는 야구에서 그만한 진용을 갖추고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 이상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자이언츠의 투수들은 불꽃같이 타올랐지만 오래도록 타지는 못했다. 84년부터 86년까지 3년 사이에 66승을 올리는 전설적인 활약을 보인 '대한민국 에이스' 최동원이 무리한 등판 후유증에 선수회 파동이나 연봉 갈등 같은 야구외적 불운까지 얽히며 쓸쓸히 사라져간 것은 이를 상징했다.

그 이후에도 데뷔 시즌인 92년에 17승을 올리며 팀을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은 염종석이 그 이듬해 10승을 올린 뒤로는 단 한 차례도 두자릿수 승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96년 18승으로 구대성과 함께 다승왕에 올랐던 주형광이 걷고 있는 기나긴 하락세 또한 그렇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이언츠는 전통적으로 선발진이 강한 대신 마무리가 약했다. 이것은 불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선수를 뽑고 채우고 길러내며 기용하는 코칭 스태프의 책임에 해당한다. 거기에 덧붙여 과거 자이언츠의 팀컬러는 지나치리만큼 저돌적이었다. 선수들이 5년, 10년 내다보며 몸 관리를 하기에는 하루하루의 승부에 임하는 투지가 너무 뜨거웠다.

그래서 리그를 지배할 정도로 막강했던 에이스급 선발투수들이 대개는 마무리가 맡아주어야 할 경기 후반까지 공을 던져야 했고 3, 4선발이 맡아주어야 할 경기들까지 책임지느라 턱없이 짧은 등판간격을 감당해야 했다. 그 거듭된 무리야말로 자이언츠 마운드에서 짧게 타올랐던 불꽃의 한 가지 진실이었다.

그런데 최동원에 이은 '2선발'로 등장한 이래 후배 박동희와 염종석과 주형광이 명멸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윤학길은 항상 로테이션을 지키며 등판해서 '별 일 없으면' 이기든 지든 끝까지 던지는 투수였고 또 대개의 경우 해마다 10승 이상을 올려주는 강한 투수였다.

고독한 황태자

▲ 93년, 서군과 동군 올스타 선동열과 윤학길이 손을 마주잡고 있다.
ⓒ2006 한국야구위원회
그리고 시즌 3승에 불과했던 1990년에도 두 번은 완봉승을 거두었을 정도로 철저히 혼자인 선수였다. 선동열에게 송유석이 있었고, 정민태에게 조웅천이 있었듯 혹은 최동원을 위해 임호균과 박동수를 비롯한 팀의 모든 투수들이 나서서 뒷받침을 해야 했듯 받쳐줄 선수가 윤학길에게는 없었다.

그는 통산 308경기에 등판해서 100번이나 완투를 했고 그 중에서 거둔 74번의 완투승을 포함해 모두 117번의 승수를 쌓았다. 세 번 나오면 한 번 꼴로 완투하는 고단한 프로생활을 그는 12시즌이나 이어갔다. 그러면서 자이언츠 팀 역사상 가장 많은 공을 던지고 가장 많은 승리 그리고 우리 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완투경기를 기록하며 팀의 빈틈을 가장 부지런히 메워냈다.

그리고 대개 그런 무리와 헌신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축적되었고, 그것은 눈에 드러나는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결정적인 패전의 순간 직전으로 눈을 옮겨보면, 종종 그에게 팀이 지워주었던 무리한 짐이 발견된다.

92년 한국시리즈 2차전, 9회말 석 점을 앞선 상황에서 선발 윤형배가 주자 두 명을 내보내자 윤학길에게 구원등판 지시가 떨어졌다. 다음 경기 선발등판이 내정되어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등판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지켜냈지만 두 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두 점을 내줘 삐끗거려야 했다. 그리고 이틀 후 3차전에 선발 등판한 윤학길은 다시 완투했지만 5점을 내주며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그 전 해였던 91년 준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역전 투런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져 내리기 사흘 전에는 이미 2차전 선발로 등판해 정규 9이닝을 2실점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또한 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단 한 개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강판되기 전에는 이미 3차전에서 9이닝을 혼자 책임졌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잊혔고, 실패는 아프게 기억에 남았다.

어려서 고래 고기를 많이 먹어 강골이 되었다고 말하는 장생포 출신의 이 투수는 그 소심한 성격만큼이나 무던하게 기초를 다진 덕에 하체근육이 튼튼하고 어깨가 단단했다. 그 덕에 다른 선수들이 한두 해 만에 나가떨어질 만큼 고된 짐을 묵묵히 맡아 십 년 이상을 걸어갔다. 그러나 그 묵묵함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고, 그의 앞으로 '불꽃'같이 타오른 후배들이 차례로 지나가며 그 은은한 빛을 가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고독한 황태자'가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지원군도 없고 후방 병참부대도 없이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기대 밖의 승리를 잡아내는 윤학길의 모습이 바로 '고독함'의 정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팀의 얼굴로 부각되지 못하는 그에게 전하는 팬들의 마음의 보상이 '황태자'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가 마운드를 지키던 시절 자이언츠는 강팀이었다. 우승도 했고 포스트시즌에도 종종 올라섰다. 그럼에도 '윤·학·길'은 되새길 때마다 영광의 순간을 떠올려주는 이름은 아니다. 그 이름은 존재감은 없지만 꾸준히 힘을 발휘해준 선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마운드를 내려간 뒤 두 번, 그리고 다시 네 번, 연속꼴찌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던 자이언츠가 가장 그리워해야 했던 이름이 단연 윤학길이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자리를 메워오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빛나는 시절 역시 빛나는 선수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바로 윤학길이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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